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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류:루이나]][[분류:랜드사]][[분류:검은 10년]][[분류:극우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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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include(틀: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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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include(틀:검은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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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tablealign=right><tablewidth=450><tablebordercolor=#000,#fff><tablebgcolor=#fff,#1c1d1f><bgcolor=#000><colcolor=#fff> '''{{{+1 콜마르 시청 광장 총격전}}}[br]Colmar Town Hall Square shootout[br]Перестрелка на Ратушной площади''' ||
8||<-2><nopad>[[파일:콜마르 시청 광장 총격전.jpg|width=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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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width=25%><colbgcolor=#131230> '''발생일''' ||1974년 5월 22일 11시 05분 ~ 15시 10분[* 총 4시간 5분.] ||
11||<|2> '''발생 장소''' ||시청 광장 및 인접 가로[br]{{{-2 [include(틀:국기, 국명=루이나)] 콜마르}}} ||
12||<nopad> [include(틀:지도, 장소=콜마르 시청 광장, 너비=100%)] ||
13|| '''유형''' ||'''[[총격전]]''', '''[[테러]]''' ||
14|| '''가해 조직 및 가해자''' ||'''[[공화국의 방패]]''' 강경파[br] • 뤼시앵 바르도[* 콜마르 지부장이자 지하화한 강경파의 지도자. 이 교전에서 사망.][br] • 관련 인원 약 40명[* 검거 21명, 사망 9명, 도주 10명 안팎으로 추산.] ||
15|| '''대응 기관''' ||콜마르 시경찰[br]국무부 [[루이나 기동경찰국|기동경찰국]][br]법무부 광역범죄조사과 ||
16||<bgcolor=#000000> {{{#white '''사망'''}}} || '''19명'''{{{-2 (경찰 7 · 민간인 3 · 방패 측 9)}}} ||
17||<bgcolor=#FFBB00> {{{#black '''부상'''}}} || '''52명''' ||
18|| '''영향''' ||각 시 특수기동대 창설[br]현장 지휘 일원화 절차 도입[br]방패 강경파의 조직적 약화[br]'도심 총격전' 개념의 정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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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지금 광장 남쪽에서 다시 총성이 들립니다. 몇 발인지 셀 수가 없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시청 방면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시청 방면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21> ----
22> 콜마르 지역방송 정오 생중계 녹음
23
24> '''"우리는 시위 진압 장비로 소총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했다. 네 시간 동안 누가 지휘하는지도 몰랐다."'''
25> ----
26> 1975년 조사특별위원회에 출석한 콜마르 시경찰 현장 지휘관의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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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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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31== 개요 ==
321974년 5월 22일 [[루이나]] 콜마르의 시청 광장과 그 주변에서 극우 조직 [[공화국의 방패]]의 강경파와 경찰이 4시간 5분간 교전한 사건. 경찰 7명, 민간인 3명, 방패 측 9명 등 모두 19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했다.
33
34루이나에서 '''도심 총격전'''이라는 표현이 일반화된 계기이며, 대낮의 시가지에서 무장 집단이 공권력과 정면으로 교전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된다. 사건 당일이 정기 장날이어서 광장에 다수의 시민이 있었고, 대피가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
35
36교전에서 강경파 지도자 뤼시앵 바르도가 사망했다. 이후 방패 강경파는 지부 간 연락과 자금 배분 능력을 상실하며 급격히 약화되었고, 1976년 지부 조직이 소멸했다.
37
38이 사건은 루이나 경찰 제도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부처별로 파편화된 경찰 조직이 하나의 현장에서 지휘권을 정리하지 못한 채 네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각 시의 특수기동대 창설과 현장 지휘 일원화 절차의 도입으로 이어졌다.
39
40== 배경 ==
41=== 방패 강경파의 지하화 ===
42[[공화국의 방패]]는 [[루이나 국방부 특무처|국방부 특무처]]가 [[제방 계획]]의 실행 수단으로 양성한 극우 조직이었으나, 1965년 이후 자금과 표적을 독립시키며 통제를 벗어났다. 1970년 2월 국가안보회의는 방패 지도부를 [[회수 작전]]의 표적으로 지정했고, 같은 해 8월 특무처가 [[롱비치 항만 창고 습격|롱비치 항만 창고의 지도부 회의를 습격]]해 총재 이하 9명을 사살했다.
43
44지도부 제거 이후 조직은 분열했다. 온건파는 1971년 5월 해산을 선언한 반면, 콜마르 지부장 뤼시앵 바르도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습격에 국가기관이 관여했다고 판단해 지하화했다. 이후 강경파는 자신들에게 연락하던 공작 담당자를 보복 대상으로 삼았고, 1970년부터 1972년까지 특무처 요원 6명이 살해된 것으로 파악된다.
45
46경찰은 이 배경을 알지 못했다. 특무처는 존재를 드러낼 수 없었으므로 자료 제공을 거절하거나 인물의 신분을 축소해 설명했고, 경찰은 자신이 추적하는 집단이 과거 국가의 훈련과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일반 무장 범죄조직으로 수사했다.
47
48=== 콜마르의 상황 ===
49콜마르는 방패의 초기 지부가 설치된 도시 가운데 하나로, 중공업 중심의 공업 도시이자 노동조합이 강한 지역이었다. 방패는 1963년부터 이 지역에서 노동조합 파괴 용역을 수주했고, 지하화 이후에도 지역 내 지지망이 남아 있었다.
50
511973년부터 콜마르 시경찰은 강경파 관련 인원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으나, 조직의 실체나 규모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사건 직전인 1974년 5월 초 인접 시에서 강경파 인원 4명이 검거되면서 수사가 진전되었고, 이 과정에서 콜마르 지역 간부 3명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52
53== 전개 ==
54=== 발단 ===
551974년 5월 22일은 콜마르 시청 광장에 정기 장이 서는 수요일이었다. 오전 시간대 광장과 인접 가로에는 노점 130여 개가 늘어서 있었고 시민 수천 명이 있었다.
56
57콜마르 시경찰은 이날 오전 광장 북측 건물에서 간부 3명에 대한 체포영장을 집행하기로 했다. 투입된 인원은 사복 수사관 6명과 정복 경찰관 8명이었다.
58
59경찰이 파악한 정보는 부정확했다. 해당 건물에는 3명이 아니라 강경파 관련 인원 약 40명이 모여 있었다. 인접 시의 검거로 발생한 조직 정비 문제를 논의하는 회합이었던 것으로 이후 확인되었다.
60
61=== 초기 교전 ===
62'''11시 05분''' 경찰이 건물 진입을 시도하자 내부에서 사격이 시작되었다. 진입조 선두의 경찰관 2명이 계단에서 즉사했고 3명이 부상했다. 나머지 인원은 건물 밖으로 후퇴했다.
63
64'''11시 12분''' 콜마르 시경찰 상황실이 비상소집을 발령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 광장에 있던 시민에 대한 대피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상황실은 소규모 총격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65
66'''11시 20분''' 건물 내부의 인원 일부가 창문과 옥상에서 광장을 향해 사격했다. 노점 사이에 있던 시민들이 흩어졌고, 이 과정에서 압사 위험이 발생해 다수의 부상자가 나왔다. 시장 상인 마르틴 P. 로셰가 노점 뒤에서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
67
68=== 확산 ===
69'''11시 40분''' 방패 측 인원 약 15명이 건물 후면으로 빠져나가 광장 남쪽 골목과 인접 건물로 이동했다. 이 시점부터 교전은 단일 건물의 포위전이 아니라 광장을 둘러싼 여러 지점의 산발적 총격으로 바뀌었다.
70
71'''12시 05분''' 콜마르 시경찰 증원 병력 60여 명이 도착했다. 그러나 장비는 권총과 시위 진압용 방패가 대부분이었고, 자동 사격이 가능한 무기를 가진 상대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광장 서측을 봉쇄하던 경찰관 3명이 이 시간대에 사망했다.
72
73'''12시 30분''' 지역방송이 현장 생중계를 시작했다. 방송은 시민에게 시청 방면 접근을 삼가라고 반복해 알렸고, 이것이 이후 두 시간 동안 실질적인 대피 안내 역할을 했다.
74
75'''13시 10분''' 방패 측이 사제폭탄 2개를 시청 청사 방향으로 투척해 정면 1층이 파손되었다. 청사 안에 남아 있던 직원 40여 명은 지하로 대피했으며, 이 과정에서 시청 직원 클레르 A. 몽투아가 사망했다.
76
77'''13시 25분''' 광장 동측 주거 건물에서 아홉 살 뤼크 D. 바니에가 창가에 있다가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78
79=== 지휘 혼선 ===
80'''13시 50분''' 국무부 [[루이나 기동경찰국|기동경찰국]] 병력 120명이 도착했다. 뒤이어 법무부 광역범죄조사과 수사관들도 현장에 진입했다.
81
82세 기관은 소속 부처가 서로 달랐고 현장 지휘권에 관한 규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콜마르 시경찰은 관할을, 기동경찰국은 병력과 장비를, 광역범죄조사과는 사건의 수사 주관을 각각 근거로 지휘를 주장했다. 무전 주파수가 서로 달라 직접 교신도 되지 않았다.
83
84'''14시 20분''' 콜마르 시장이 국무부에 직접 연락해 기동경찰국장에게 현장 지휘를 위임하는 형식으로 문제가 정리되었다. 교전 시작으로부터 3시간 15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85
86=== 진압 ===
87'''14시 40분''' 통합 지휘가 성립한 뒤 기동경찰국이 광장 남쪽 골목부터 순차적으로 소탕에 들어갔다. 이 단계에서 방패 측 5명이 사살되고 14명이 검거되었다.
88
89'''14시 55분''' 최초 발단이 된 북측 건물에 대한 진입이 이루어졌다. 3층에서 저항하던 뤼시앵 바르도가 사살되었으며, 진입 과정에서 경찰관 2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90
91'''15시 10분''' 교전이 종료되었다. 방패 측 사망 9명, 검거 21명이었고 10명 안팎이 인접 건물을 통해 도주한 것으로 추산된다.
92
93== 피해 ==
94=== 사망 ===
95경찰 7명이 사망했다. 건물 진입조 2명, 광장 서측 봉쇄조 3명, 최종 진입조 2명이다. 모두 콜마르 시경찰 소속이며 기동경찰국 병력의 사망자는 없었다.
96
97민간인 사망자는 3명이다. 시장 상인 마르틴 P. 로셰(향년 67세)는 교전 초기 노점 뒤에서 유탄에 맞았고, 시청 직원 클레르 A. 몽투아(향년 34세)는 사제폭탄 투척 당시 청사 1층에서 사망했다. 아홉 살 뤼크 D. 바니에는 광장 동측 주거 건물 창가에서 유탄에 맞았다.
98
99방패 측 사망자는 9명이며 지도자 뤼시앵 바르도가 포함된다. 이 가운데 6명은 진압 과정에서 사살되었고 3명은 교전 중 사망했다.
100
101=== 부상과 물적 피해 ===
102부상자는 52명이다. 경찰 24명, 민간인 17명, 방패 측 11명이며, 민간인 부상자 가운데 8명은 총상이 아니라 대피 과정의 압박과 낙상에 의한 것이다.
103
104물적 피해는 시청 청사 정면과 광장 주변 건물 31동, 노점 90여 개에 발생했다. 시청 청사의 복구는 1975년 완료되었으나 정면 석재의 탄흔 일부는 보수하지 않고 남겨 두었다.
105
106== 드러난 문제 ==
107=== 대피 실패 ===
108가장 크게 문제가 된 것은 교전 시작 후 두 시간 넘게 광장의 시민에 대한 조직적 대피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상황실이 초기에 소규모 총격으로 판단했고, 이후에는 대피를 지시할 지휘 계통 자체가 정리되지 않았다.
109
110실질적인 대피 안내를 수행한 것은 지역방송의 생중계였다. 이 방송이 없었다면 민간인 피해가 훨씬 컸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나, 동시에 방송이 현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달하면서 방패 측이 경찰의 배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이 사건 이후 루이나 언론계에서는 진행 중인 교전과 인질 상황의 실시간 중계를 자제하는 관행이 생겼다.
111
112=== 지휘 혼선 ===
113루이나는 단일 국가경찰을 두지 않고 각 부처가 소관 영역별로 경찰기관을 보유하는 체계를 유지해 왔다. 이 사건은 그 체계가 하나의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하지 못하는지를 드러냈다.
114
115세 기관은 무전 주파수, 지휘 부호, 출동 절차가 모두 달랐고 상호 협조의 법적 근거도 없었다. 지휘권이 정리된 것은 시장이 국무부에 직접 연락해 정치적 경로로 위임을 만들어 낸 뒤였으며, 이는 제도가 아니라 개인의 판단에 의존한 해결이었다.
116
117=== 장비와 훈련 ===
118콜마르 시경찰이 보유한 장비는 권총과 시위 진압용 방패, 최루탄이 대부분이었다. 자동 사격이 가능한 무기로 무장하고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집단을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19
120방패 측의 무장은 합법 구매한 반자동 소총을 자동 사격이 가능하도록 개조한 것과 지부에서 제작한 사제폭탄이었다. 개조 방법은 특무처 제5과가 교범으로 정리해 방패 각 지부에 배포한 것이며, 사격과 시가전 훈련도 특무처 훈련장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만 이 사실은 당시 알려지지 않았다.
121
122== 영향 ==
123사건 이후 각 시 경찰에 특수기동대가 창설되었다. 벨포르 시경찰청 특수기동단(SRT)을 비롯해 1975년까지 주요 도시 8곳에 전담 부대가 편성되었고, 중화기 보유와 전술 훈련이 제도화되었다.
124
125현장 지휘의 일원화 절차도 마련되었다. 복수의 경찰기관이 동일 현장에 투입되는 경우 최초 신고를 접수한 기관이 지휘를 맡되 일정 규모를 넘으면 국무부 기동경찰국으로 이관하도록 하는 규정이 1975년 시행되었다. 다만 이 규정은 경찰기관 사이에만 적용되어 부처별 파편화 자체는 그대로 남았다.
126
127부상자 후송 체계와 현장 응급 처치 절차도 개편되었다. 이 사건에서 부상자 다수가 교전 지역 안에 고립되어 후송이 지연되었기 때문이다.
128
129방패 강경파는 이 사건으로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바르도의 사망으로 지부 간 연락과 자금 배분을 조정하는 인물이 사라졌고, 검거된 21명을 통해 다른 지역의 조직 정보도 부분적으로 드러났다. 이후 강경파의 활동은 산발적 보복에 그쳤으며 1976년 지부 조직이 소멸했다.
130
131'''도심 총격전'''이라는 표현이 일반화된 것도 이 사건부터다. 그 이전까지 총격전은 범죄 검거 과정의 국지적 충돌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이 사건 이후 훈련받은 무장 집단이 시가지에서 공권력과 장시간 교전하는 형태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이 형태는 [[검은 10년]] 내내 반복적으로 나타났으며, 1989년 [[루이나 헌정 위기|헌정 위기]]에서 극우 무장세력이 의사당을 공격한 사건도 같은 계보에서 이해된다.
132
133== 수사와 재판 ==
134검거된 21명에 대한 재판은 1975년부터 1976년까지 진행되었다. 19명이 기소되어 전원 유죄가 확정되었고, 형량은 무기징역 4명을 포함해 대부분 20년 이상이었다.
135
136재판 과정에서 피고인 다수가 노스클리프 산악 훈련장에서 사격과 폭발물 취급, 시가전 교육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들은 훈련장의 소재를 특정하지 못했다. 이동이 야간에 차량으로 이루어졌고 훈련장이 민간 사격 클럽의 시설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137
138법원은 이 진술을 신빙성 부족을 이유로 판단에서 배제했다. 진술이 사실이라면 국가기관의 관여를 뜻하는 것이었으므로, 이 배제는 이후 [[제방 계획]]의 존재가 확인된 뒤 재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다만 진술한 피고인들 역시 훈련을 제공한 주체를 알지 못했으며, 자신들이 국가기관과 연결되어 있다고 진술한 사람은 없었다.
139
140수사는 방패 강경파를 무장 범죄조직으로 규정하고 종결되었다. 조직의 기원과 자금원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41
142== 기타 ==
143 * 사건 당일이 정기 장날이었던 것은 우연으로 파악된다. 방패 측의 회합은 인접 시의 검거에 대응하기 위해 급하게 소집된 것이었고, 경찰의 영장 집행 일자도 장날을 고려하지 않고 정해졌다. 양측 모두 광장에 수천 명이 있는 날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사후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144
145 * 시청 청사 정면 왼쪽 석재에는 탄흔 열한 개가 보수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1975년 복구 당시 시의회가 보존을 결정한 것으로, 아래에 사망자 열아홉 명 전원의 이름을 새긴 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방패 측 사망자 9명의 이름을 함께 새긴 것을 두고 논란이 있었으나 시의회는 결정을 유지했다.
146
147 * 광장의 정기 장은 사건 이후 6주간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었다. 현재까지 매주 수요일에 열린다.
148
149 * 지역방송의 4시간 생중계 녹음은 전량 보존되어 있으며 1994년 공개되었다. 방송 진행자가 총성이 들릴 때마다 시청 방면 접근을 삼가라고 반복하는 대목이 이후 여러 작품에 인용되었다.
150
151 * 최종 진입에서 바르도를 사살한 기동경찰국 대원의 신원은 공개되지 않았다. 당시 규정에 따른 것이며, 이후 이 관행은 특수기동대 운용 규칙으로 성문화되었다.
152
153 * 사건 당시 콜마르 시장은 이후 지휘 위임의 근거를 묻는 질의에 "규정이 없어서 전화를 걸었다"고 답했다. 이 답변은 부처별 경찰 파편화를 비판할 때 지금도 인용된다.
154
155 * 도주한 것으로 추산되는 10명 안팎 가운데 이후 검거된 인원은 4명이다. 나머지는 신원이 특정되지 않았다.
156
157== 대중매체에서 ==
158 * 영화 《[[11월의 거리]]》(1987) - [[검은 10년]]의 도심 총격전을 다룬 최초의 극영화. 특정 사건을 재현한 것은 아니나 광장 교전 장면이 이 사건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9
160 * 다큐멘터리 《네 시간》(1994) - 지역방송 생중계 녹음의 공개에 맞추어 제작되었다. 녹음을 시간순으로 재생하면서 당시 현장 인물들의 증언을 교차시키는 구성이다.
161
162 * 소설 《수요일의 광장》(2001) - 노점 상인의 시점에서 사건을 재구성한 작품.
163
164== 관련 문서 ==
165 * [[공화국의 방패]]
166 * [[회수 작전]]
167 * [[제방 계획]]
168 * [[검은 10년]]
169 * [[루이나 국방부 특무처]]
170 * [[롱비치 항만 창고 습격]]
171 * [[벨포르 동부 지구 총격전]]
172 * [[루이나 기동경찰국]]
173 * [[MIA|광역수사국]]
174 * [[루이나 헌정 위기]]
175 * [[루이나/역사]]
176
177== 둘러보기 ==
178[include(틀:검은 10년의 주요 사건)]